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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설화.가전.소설 중 임제의 고전소설 수성지 작품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설화.가전.소설의 작품의 주제 내용은 인간의 심적조화 필요성 입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은 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임제의 고전소설 수성지
임제의 고전소설, 수성지<백호집>
줄거리
천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그의 신하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시(視), 청(聽), 언(言), 동(動) 등이 제각기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충신, 의사로서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이 수성을 쌓게 된다. 성중에 조고대와 충의문, 장렬문, 무고문, 별리문 등 네 문을 설치하고, 항상 불안과 수심에 싸여 살게 되자, 그 세력이 천군에까지 미치게 된다. 중대한 위기에 처한 천군에게 주인옹은 수성을 뿌리째 없애 버릴 있는 방책을 제안하면서 국양을 추천한다. 그러자 공방(돈)이 국장군을 영접하여 수성을 치도록 하니, 국장군은 모영을 불러 천군의 명을 받고 신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성을 쳐서 마침내 항복을 받아 온 성 안은 화기가 돌고 수심을 일시에 없어졌다. 그래서 천군의 나라는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된다는 내용
핵심정리
▶연대 : 조선 선조(16세기)
▶갈래 : 소설(의인체 소설, 한문소설)
▶형식 : 가전체가 소설로 발전된 한문 소설이자 의인체 소설
▶성격 : 풍자적, 교훈적, 우의적, 연대기적
▶표현 : 의인법(인간의 마음을 의인화)
▶주제 : 인간의 심적 조화의 필요성
구성 : 기승전결(起承轉結)
▶기 :
① 천군이 왕위에 올라 이성과 감정, 감각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누렸다.
② 2년 뒤, 천군이 문사에만 치우치자, 주인옹이 중화(中和)로 다스릴 것을 상소하여 바로 잡았다.
▶승 :
③ 천군이 무극옹과 고증 연구를 하던 차에 칠정 가운데 애공이 수심의 내습을 고하였다.
④ 천군이 시름을 이기지 못하여 팔방으로 두루 돌아다니려 하였으나 주인옹의 만류로 자제하였다.
⑤ 8월에, 굴원과 송옥이 초췌한 모습으로 와서 땅 한 구석에 성을 쌓고 살게 해 달라고 하자 천군이 허락하였다.
⑥ 천군이 축성하는 것을 보니, 옛날에 무고하게 죽은 충신, 지사, 백성들이 성을 쌓고 수성이라 하였다.
⑦ 천군이 수성 안의 조고대에 올라 보니, 원통하게 죽은 자들이 사방의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⑧ 이로부터 천군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만사에 뜻이 없이 지내게 되었다.
▶전
⑨ 이듬해 봄. 주인옹이 수성으로 인한 폐해를 없애려면, 수성을 공격할 장수 국양을 찾아오게 한다.
⑩ 천군이 주인옹의 뜻을 받아들여 공방으로 하여금 수성을 공격할 장수 국양을 찾아오게 한다.
⑪ 국양이 성에 이르러 항복할 것을 요구하며 공격하니 성민이 모두 항복하였다.
▶결 :
⑫ 천군이 이 소식을 듣고 영대에 올라 보니 온 성에 화기가 돌고 근심스런 빛이 사라져 천지가 명랑해졌다.
⑬ 천군이 크게 기뻐 국양을 비롯한 관련 관료(官僚)들을 불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재결(裁決) : ① 옳고 그름을 가려 결정함. ② 행정 심판 기관이 행정 심판의 청구에 대하여 심리의 결과를 판단함.
*격현 : 심장이 흉격에 붙어 있으므로 천군의 도읍에서 가까운 곳으로 격현을 설정해서 의공간화한 것이다. 흉해도 역시 같은 설정이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 : 굴원을 말하고, 굴원은 초회왕을 섬겼으나 상관 대부로 있던 참소로 왕과 멀어짐. 그는 어부사에서 그 자신을, 물가에서 노닐며 읊조리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비쩍 말랐다고 표현하였음. 초사의 이소편에서는 자신을 절운의 높은 관을 쓰고 연잎으로 옷을 해 입고 초란의 패를 찬 모습으로 그리고 있음.
*초란(椒蘭) : 향기가 좋은 식물 이름.
*뒤에 따라 오는 사람 : 굴원의 제자. 송옥을 말함
*뇌외 : 원래 돌무더기를 의미하는 말. 가슴 속에 쌓인 불평한 기운을 비유하기도 한다. 이 역시 의공간화한 것으로 수성을 도입하기 위한 설정이다.
*추연히 : 처량하고 슬프게
*조서 : 왕의 명을 알리는 문서
*출납관 : 입을 의인화한 말
*낙백 : 넋을 잃음
*부소·몽염 : 부소는 진시황의 장자로서 인물이 뛰어났기 때문에 도리어 참소를 입어서 장군 몽염과 장성을 쌓는 공사를 감독하는데 나가 있었음.
*생매장 당한 선비 :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할 때 희생된 선비들
*형곡 : 진시황이 선비들을 파묻어 죽였던 여산의 골짜기
*아미산 : 중국 사천성에 있는 산이름으로 아미는 눈썹을 일컫는 말인 아미로 통하기 때문에 눈썹 부위를 나타낸 것임.
*조고대 : 옛날을 조문하는 대라는 의미
*단전 : 배꼽 아래로 한 치 다섯 푼 되는 곳. 아랫배에 해당하며 여기에 힘을 주면 건강과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이해와 감상
조선 선조 때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지은 한문 단편소설로, 창작 동기는 작자가 북평사(北評事)에서 서평사(西評事)로 전출할 때 떠날 길을 멈추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울적한 심회를 의인법을 사용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즉 인간의 심성인 천군(天君)이 수성(愁城 : 근심의 세계)을 쳐서 수기(愁氣)를 물리치고 주연(酒宴)을 베풀어 명랑함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로, 이 작품은 단순한 현실도피라기보다는 현실 풍자의 수법으로 현실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토로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마음을 의인화한 천군은 마음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여러 사물들, 술, 붓 등이 의인화 되어있다. 전반부는 천군전 같은 초기 천군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후반부에서는 수성을 격파하고 국양장군이 활약하는 상황은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등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천군소설과는 달리 허구적 수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표현하는데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으나, 사실로의 환원이 배제되어 있어 본격적인 소설로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성지는 사물을 의인화하는 가전의 수법을 답습하고는 있지만, 심적 세계와 사물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 가전 문학의 일대기 형식을 벗어난 점, 서술자의 평이 없어진 점을 고려하면 가전체가 소설쪽으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심화자료>
▲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는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 찼다.
임제가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임제는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서도병마사, 북도병마사,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 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 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임제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은 임제를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임제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과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로 지기(知己 ; 친구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에 여러 아들에게 “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 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 고 한 뒤에 “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 ” 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임제는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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