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학정보입니다.
오늘은 설화.가전.소설 중 이첨의 가전체 저생전 작품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설화.가전.소설의 작품의 주제 내용은 종이의 생애 입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은 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이첨의 가전체 저생전
이첨의 가전체, 저생전(楮生傳)<동문선>
줄거리
내용은 서두, 선계(先系), 사적(事蹟), 후계(後系). 평결(評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두에서 저생의 성은 저(楮닥나무), 이름은 백(白흼), 사는 곳은 종이의 생산지인 회계라는 것을 밝혔으며, 선계에서는 종이를 처음으로 만든 채륜의 후예라는 것을 서술하였다.
사적에서는 본래 그는 천성이 정결하여 무인보다 문인을 좋아하고 모학사(毛學士붓)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학문을 하여 천지음양의 이치와 성명의 근원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의 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내력을 통시적으로 언급하여, 종이의 발명시기인 한 대부터, 진, 수, 당과 작자 당시인 원, 명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용도와 내력을 기술하였다.
후계는 종이의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었다.
평결에서는 종말을 설명하고, 후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칭찬하였다.
▶어휘 및 구절풀이
*생(生) : 성 뒤에 붙여 젊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채륜 :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으로 후난[湖南] 출생. 종이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으로서, 97년에 검(劍) 등을 만들었고, 그 후 목간(木簡)․죽간(竹簡)․견포(絹布) 대신 쓸 수 있는 서재(書材)를 발명했다. 이것은 톱밥 ․헝겊 ․풀 등을 소재로 한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이다. 그는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음독 자살하였다.
*그의 아우는 모두 19명이나 된다 : 종이는 한 권이 20장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말.
*중산 : 중국에 있는 지방의 하나로 예부터 품질 좋은 붓이 많이 나온다함.
*명수 : 운명 또는 수명.
*제자백가 : 춘추 전국 시대의 여러 학파. 공자(孔子), 관자(管子), 노자(老子), 맹자(孟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윤문자(尹文子), 손자(孫子), 오자(吳子), 귀곡자(鬼谷子) 등의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을 통틀어 이른다
*책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방정과 : 한나라 과거제의 하나
*저국공 백주 자사 : 종이이기 때문에 닥나무 저자를 써서 저국공이라 한 것이고, 희기 때문에 백주라고 한 것임.
*홍문관 : 고려 시대에, 학사(學士)들이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성종 14년(995)에 숭문관을 고친 것이다.
*저수량 : 중국 당나라 때의 서예가
*구양순 :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로 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화도사비(化度寺碑)》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상고 : 서로 견주어 토론하는 것
*정관의 좋은 정치 : 정관의 치로 중국 당(唐)나라 제2대 왕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治世:626~649)를 말하며 이때의 연호가 정관(貞觀)이다. 수(隋)나라 말기 전국적인 동란과 백성의 피폐 가운데 굳건히 일어서서, 당나라의 국초(國礎)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율령체제(律令體制)의 정비에 따라 학교․과거(科擧)도 발달하였다. 안으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 등의 명신들이 문치(文治)를 도왔으며, 밖으로는 돌궐(突厥)을 제압하고, 토번(吐審)을 회유하여 국위를 널리 떨쳤다.
*정주학 : 심화 자료 참고
*사마온공 : 사마광. 북송 때의 관료 정치가
*자치통감 : 중국 북송 때 사마광이 지은 통사적 사서
*왕안석 : 송(宋)나라의 개혁정치가. 신법당의 영수로 본적은 무주(撫州) 임천(臨川). 자 개보(介甫). 1042(경력 2)년 진사출신으로 강남지역의 지방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재(理財)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때마침 정치의 일대 쇄신과 개혁을 갈망한 야심적 황제 신종(神宗)에 의해 발탁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는 1069년(熙寧 2)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어 국정전반을 관장하기에 이르자 한 기(韓琦)․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 인물들을 축출하고 이재에 능한 강남출신 신진관료들을 대거 발탁 기용하여 신법(新法), 즉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목적으로 종래 가뭄과 홍수 등으로 황폐해진 전토의 복구와 어전법(隙田法) 등에 의한 새로운 경작지의 조성 및 하천의 개수(開修) 등을 통한 조운(漕運)의 진흥 등을 골자로 한 농전수리(農田水利)정책, 농민에 대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청묘법(靑苗法), 도시의 중소상인들을 대상1으로 한 저리의 금융정책인 시역법(市易法), 차역(差役) 부담 대신 재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하게 한 모역법(募役法), 모병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唐)의 부병제(府兵制)하의 국민개병제 원칙을 모범으로 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국가행정의 효율성 증대 등에서 일정한 실적을 거두었으나 원래의 취지 중의 하나인 중소농민과 중소상인의 구제라는 면에서는 결과적으로 세역의 증대, 화폐경제의 강요 등으로 인해 후진지대에서는 오히려 영세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문제점도 있었으며, 또한 이는 반대파인 구법당 이 재집권하게 되는 주된 명분이 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몸에 돈 꾸러미를 두르고 : 남송 말년에 종이로 돈을 만들어 쓰는 법이 생겼기 때문에 한 말.
*사씨 :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
*대부 : 벼슬 품계에 붙이던 칭호
*태사공 : 사마천. 중국 전한의 역사가 여기서는 작가를 대변하는 인물임.
*무왕 : 주나라 제 1대왕
*주 : 은나라의 마지막 왕. 중국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중국의 폭군으로 일컬어짐.
*주공 : 주나라의 정치가로 무왕의 동생.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왕이 죽은 뒤 성왕을 왕위에 앉히고 섭정 7년 동안 주나라 왕실의 기초를 튼튼히 닦고 어진 정치를 했음.
*교화 : 백성을 가르쳐 감화시킴
이해와 감상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첨이 종이를 의인화해서 지은 가전체 작품, 동문선 제 101권에 실려 있고, 이 작품에 의인화되어 있는 저생의 생애는 작자 이첨의 실제 생활과 유사하고, 이렇게 지은 작자가 교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저생의 일생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서두․선계․사적․후계․평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당시의 부패한 선비의 도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작품의 끝부분 "왕자의 후손들은 그 조상이 대대로 융성해지고 쇠약해지는 것은 모두 운명과 교화의 탓이었다."에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핵심정리
▶연대 : 고려말(14세기)
▶작자 : 이첨
▶갈래 : 가전
▶성격 : 경세적, 교훈적
▶주제 :
① 근시(近侍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와 정객(政客)들의 직간(直諫)을 주제로 하여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
② 문신으로서의 바른 삶(근시(近侍)와 정객(政客)들의 직간(直諫)을 주제로 하여 위정자들에게 올바른 정치를 권유하는 교훈이 담김)
▶특징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인물의 행적과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
구성
서두 저생의 성은 저(닥나무), 이름은 백, 사는 곳은 회계(종이의 생산지)
선계 저생은 채륜(종이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의 후예임
사적 본래 그는 천성이 정결하여 무인보다 문인을 좋아하고 모학사(붓)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천지음양의 이치와 성명의 근원에 통달하였고, 제자백가의 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그리고 종이의 내력을 말하면서 종이가 발명되던 시기인 한나라부터 원나라,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종이의 용도와 내력을 기술함.
후계 종이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눔.
평결 종말을 설명하고, 후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칭찬함.
더 알아보기
▲이첨(李詹) : 13451405
본관 신평(新平). 자 중숙(中叔). 호 쌍매당(雙梅堂). 시호 문안(文安). 1365년(공민왕 14) 감시(監試)에 합격, 1368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1369년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375년(우왕 1) 우헌납(右獻納)에 올라 이인임(李仁任) 등을 탄핵하여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388년 풀려나 내부부령(內部副令) ․응교(應敎) 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라 감시를 맡아보다가 김진양(金震陽) 사건에 관련되어 결성(結城)에 귀양갔다.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 7) 이조전서(吏曹典書)에 기용되어 1400년(정종 2) 첨서삼군부사(簽書三軍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2년(태종 2)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올라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찬수(撰修)했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에 《저생전(楮生傳)》 《쌍매당집(雙梅堂集)》 등이 있다.
출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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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감상하기
선생의 성은 저(楮)요, 이름은 백(白)이다. 자(字)는 무점(無玷)으로, 회계(會稽) 사람이다. 한(漢)나라 중상시(中常侍) 상방령(尙方令)을 지낸 채륜(蔡倫)의 후예이다.
그가 태어남에 난초꽃 욕탕에서 목욕시키고 흰빛 옥구슬로 어르면서 흰 띠풀을 가지고 꾸렸으므로, 그 빛깔이 반드르르하였다.
같은 배에서 난 그의 아우는 전부 열아홉인데, 서로 간에 모두 친목하여 한순간도 그 순서를 잃는 일이 없었다.
천성이 본디 깨끗하고 조촐하니 무인(武人)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 글하는 선비와 즐겨 노닐었다. 중산 (中山)의 모학사(毛學士)가 각별히 맺어진 벗이었으니, 아무 때고 허물없이 가까웠던지라 아무리 그 얼굴에 다 점을 찍어 더럽혀도 씻어 닦는 법이 없었다. 학문을 하여 천지·음양의 이치와 성현(聖賢), 성명(性命)의 근원에 통달하였으며, 제자백가의 글과 이단(異端)·적멸(寂滅)의 교의(敎義)에 이르기까지 기록해 적지 않 음이 없었으니, 찾아내어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한(漢)나라가 선비들에게 책문(策問)*을 실시하자, 이에 방정과(方正科)에 응시하여 바야흐로 논변 을 펴 올렸다.
“예로부터 책의 이루어짐은 대개 대쪽을 엮고 겸하여 흰 비단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둘 다 불편합니다. 신이 비록 대단치는 않사오나 성심으로 대신할까 바라오니, 만일 그 같은 보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제게 먹칠하여 주옵소서.”
화제(和帝)가 시험토록 하였는데 과연 기억력이 뛰어나서 백에 하나도 놓침이 없었으매 죽간(竹簡) 으로 된 책은 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이에 그를 치하하여 저국공(楮國公)에 백주자사(白州刺史)의 벼슬을 수여하고 만자군(萬字軍)을 다스리게 하니, 바야흐로 그 봉읍(封邑)으로 성씨를 삼았다.
수부(樹膚), 마두(麻頭), 어망(魚網), O근(O根)*의 네 사람도 함께 아뢰었지만, 모두 그 아뢴 내용만 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제외당하였다.
이윽고는 장생(長生)의 술법을 배워 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고, 좀이 슬지도 않았다. 이레째 되는 날이면 햇볕의 정기를 마시고 티끌을 털어 냈으며, 그 옷을 태우면서 고요히 처하였다.
진(晋)나라의 좌태충(左太冲)이 [제도부(齊都賦)]와 [삼도부(三都賦)]를 지은 것이 있는데, 선생이 한 번 보고는 기록하여 외워 버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베끼었다. 그 바람에 비록 평상시에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를 만나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 뒷날 왕우군(王右軍)의 필적을 받으매 천하에 기묘 한 서법의 본보기가 되었다. 양(梁)나라에 벼슬하여 태자인 소통(蕭統)과 더불어서 [고문선(古文選)] 을 엮어 세상에 알렸는가 하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위수(魏收)*와 함께 국사(國史)를 편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편견이 공정을 잃었으므로 예사(穢史)라 일컫고는 사직을 청하며 소작(蘇綽)과 함께 회계의 일이나 살폈으면 좋겠다고 하니, 윤허하는 조서를 내려 주었다. 이에 지출은 붉은빛, 수입은 검정빛으로 전체의 밝힘을 분명하게 한 바, 사람들이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그 후에 진(陳)의 후주(後主)에게 사랑을 받아 매양 총신(寵臣)인 안학사(安學士)의 무리와 어울려 임 춘각(臨春閣)에서 시도 짓고 하였다. / 수(隋)나라 군대가 경구(京口)를 넘어올 제, 진(陳)나라 장군이 밀서를 보내 급하다고 알렸으나 저생이 감추고 봉한 것을 열지 않는 바람에 진나라가 패하고 말았다.
수나라 대업(大業) 연간에는 왕주(王胄), 설도형(薛道衡)과 양제(煬帝)를 섬기면서 함께 정초(庭草) 및 연니(燕泥)에 관한 구절을 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제가 다른 사람이 자기 위에 드러남을 탐탁 히 여기지 않는 바람에 드디어는 소외와 홀대를 당하니, 종이 말듯 처신을 감추고 속으로만 품어 간직 하게 되었다.
당(唐)나라가 일어나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함에, 저생이 본관(本官) 겸 학사(學士)의 자격으로 저수 량(褚遂良), 구양순(歐陽詢) 들과 앞 시대의 일들을 강론하고 정사를 신중히 헤아리고 정하여 이른바 정관(貞觀)의 다스림*에 이르게 하였다.
송(宋)나라가 흥성하면서 염락(濂洛)의 모든 선비들이 똑같이 문명의 다스림을 천명하였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은 바야흐로 [자치통감(資治通鑑)] 을 엮을 때 저생을 해박하고 고상한 군자라 하면서 매번 더불어 자문하였다.
마침 왕형공(王荊公)이 권세를 부리는 차에 [춘추(春秋)] 의 가르침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그 책을 일러 망가져 문드러진 정치 문서라 하니, 저생이 옳지 않다고 하자 마침내는 쫓겨나 쓰이지 못하였다.
원(元)나라 초기에 이르러는 본래의 사업에 힘쓰지 아니하고, 오로지 장사만을 몸에 익혔다. 몸에 돈 꾸러미를 차고 찻집과 술집 등을 드나들면서 푼[分]과 리(厘)를 셈해 따지게 되니, 사람들 간에는 비루 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원(元)이 망하고 명(明) 황실에 벼슬하면서 그제야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입게 되었다.
자손이 아주 많았으니, 어떤 부류는 사씨(史氏)로 대를 이었고, 또 어떤 부류는 시인 집안으로 문벌을 이루었으며, 혹은 선(禪)에 관한 기록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기도 하였다. 등용이 되어 관직에 있던 자는 돈과 곡식의 수효를 맡고, 군무(軍務)에 종사하던 자는 군사의 전공을 기록했다. 그 직업 따라 하는 일에 비록 귀천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직책에 소홀하다는 비난은 듣지 않았다. 대부(大夫)가 된 뒤로는 모두가 다 흰 띠를 둘렀다고 한다.
이첨, [저생전(楮生傳)]
*책문: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던 과거(科擧) 과목.
*수부, 마두, 어망, O근: 나무껍질, 삼베 결, 고기 잡는 그물, 미상.
*위수: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학자.
*예사: 더럽혀진 역사. 혹은 사실(史實)을 왜곡하여 쓴 역사서.
*정관의 다스림: 정관은 당태종의 연호. 명군(明君)이던 당태종의 치세(治世)가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므로 그 연호를 따서 정관지치(貞觀之治)라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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