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학정보입니다.
오늘은 시조.가사 중 박인로의 가사 독락당 작품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조.가사의 작품의 주제 내용은 독락당경치예찬,이언적추모 입니다. 그럼 상세한 내용은 밑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박인로의 가사 독락당
박인로의 가사, 독락당(獨樂堂)
본문 감상
자옥산(紫玉山) 명승지(名勝地)에 독락당(獨樂堂)이 소쇄(瀟灑)홈을 들런디 오래로되, 이 몸이 무부(武夫)로서 해변사(海邊事) l 공극(孔棘)거날, 일편단심(一片丹心)에 분의(奮義)를 못내 하야 금창철마(金槍鐵馬)로 여가(餘暇)업시 분주(奔走)타가 중심(中心) 경앙(景仰)이 백수(白首)에 더욱 깁허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오날사 차자오니 봉만(峰巒)은 수려(秀麗)하여 무이산(武夷山)이 되어 있고 유수(流水)는 반회(盤回)하야 후이천(後伊川)이 되었나다. 이러한 명구(名區)에 임자 어이 업도던고.
⇒ 자옥산(현재 경주 시내에 있는 산 이름) 명승지에 독락당이 맑고 깨끗함을 들은 지 오래로되, 이 몸이 무인(武人)으로서 바다의 일(임진왜란 때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일편단심의 충의를 떨치지 못해서 금으로 만든 창과 무쇠로 만든 말을 몰아 여가 없이 분주하다가 마음 속 사모함이 늙은이(화자 자신)에게 더욱 깊어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으로 오늘에야 찾아오니 뭇 봉우리는 수려하여 무이산(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살던 곳의 산)이 되어 있고 흐르는 물은 휘감아 돌아 후이천(송나라 유학자 정이가 살던 곳의 냇물)이 되었도다. 이러한 명승지에 임자 어찌 없었던가? / 늙어서 찾아간 독락당의 빼어난 외경
일천년(一千年) 신라(新羅)와 오백재(五百載) 고려(高麗)에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이 많이도 지냈마는 천간지비(天慳地秘)하야 아선생(我先生)께 기치도다. 물각유주(物各有主) l 어든 다토리 이실소냐. 청라(靑蘿)를 헤혀 드러 독락당을 여러 내니 유한 경치(幽閑景致)는 겨흘 데 뇌야 업네.
⇒ 일천 년 신라와 오백 년 고려에 현인, 군자들이 많이도 왔으련만 하늘도 아끼고 땅이 숨겨 내 선생(독락당에 은거했다는 이언적을 가리킴)께 남겼도다. 사물은 저마다 주인이 있거든 다툴 이 있을쏘냐? 푸른 덩굴을 헤쳐 들어 독락당을 처음 지어내니 그윽하고 한가한 경치는 견줄 데 전혀 없네. / 하늘이 독락당을 회재 선생에게 줌
천간 수죽(千芉脩竹)은 벽계(碧溪)조차 둘러 있고 만권 서책(萬卷書冊)은 사벽(四壁)의 사혀시니 안증(顔曾)이 재좌(在左)하고 유하(游夏)는 재우(在右)한 듯. 상우천고(尙友千古)하며 음영(吟詠)을 일을 삼아 한중정리(閑中靜裏)예 잠사자득(潛思自得)하야 혼자 즐겨 하시덧다 독락(獨樂) 이 일홈 칭정(稱情)한 줄 긔 뉘 알리? 사마온공(司馬溫公) 독락원(獨樂園)이 아무려 조타 한들 기간 진락(其間眞樂)이야 이 독락(獨樂)에 더로손가.
⇒ 우거진 대나무 숲은 푸른 시냇물 좇아 둘러 있고 만 권 서책은 네 벽에 쌓였으니 안증(공자의 제자인 안회와 증삼)이 왼쪽에 앉고 유하(공자의 제자인 자유와 자하)는 오른쪽에 앉은 듯(이언적의 모습을 제자를 좌우에 거느린 공자에 비유). 옛 벗을 숭상하며 책 읽고 시 읊기를 일을 삼아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깊이 생각하며 깨달음을 혼자 즐겨 하시었다. 독락, 이 이름이 뜻에 맞을 줄 그 누가 알리? 사마광(북송의 명신)의 독락원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 속의 참된 즐거움이 이 독락에 더할 수 있겠는가. / 한가롭게 책을 읽던 회재 선생을 추모함
심진(尋眞)을 못내 하여 양진암(養眞菴)의 도라 드러 임풍정간(臨風靜看)하니 내 뜻도 형연(瑩然)하다. 퇴계선생 수필(退溪先生手筆)이 진득(眞得)인줄 알리로다. 관어대(觀魚臺) 나려오니 깔온 듯한 반석(盤石)의 장구흔(杖屨痕)이 보이는 듯. 수재장송(手栽長松)은 녯 빛을 띠었으니 의연물색(依然物色)이 긔 더욱 반가울사.
⇒ 진리를 찾음을 못내 하여 양진암(회재가 후학을 기르던 집채)에 돌아 들어 바람을 쏘이면서 조용히 바라보니 내 뜻도 맑고 아름답다. 퇴계선생 쓴 글이 진리임을 알리로다. 관어대 내려오니 깔아 놓은 듯한 반석 위에 (회재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자국이 보이는 듯. 손수 심은 큰 소나무는 옛 빛을 띠었으니 옛날과 변함없는 그 경치가 더욱 반갑구나. / 옛날과 변함없는 경치를 반가워함
신청기상(神淸氣爽)하여 지란실(芝蘭室)에 든 듯하다. 다소 고적(多少古跡)을 보며 문득 생각하니 층암절벽(層巖絶壁)은 운모병(雲母屛)이 절로 되야 용면묘수(龍眠妙手)로 그린 듯이 버려 잇고 백척징담(百尺澄潭)에 천광운영(天光雲影)이 얼희여 잠겨시니 광풍제월(光風霽月)이 부는 듯 바새는 듯. 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업슨 벗을 삼아 침잠완색(沈潛玩索)하여 성현사업(聖賢事業) 하시덧다. 청계(淸溪)를 빗기 건너 조기(釣磯)도 완연(宛然)할샤. 묻노라 백구(白鷗)들아 녜 일을 아나산다. 엄자릉(嚴子陵)이 어느 해에 한실(漢室)로 가단 말고 태심기상(苔深磯上)에 모연(暮烟)만 잠겼어라.
⇒ 정신이 맑아 지초와 난초가 있는 향기로운 방에 든 듯하다. 많고 적은 옛 책을 뒤져 보며 문득 생각하니 층암절벽은 운모병풍(운모로 만든 병풍)이 절로 되어 이공린(송나라 사람)의 뛰어난 솜씨로 그린 듯하고 깊고 맑은 못에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어리어 잠겨 있으니 비온 뒤에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 부는 듯 비치는(번쩍이는) 듯. 하늘에서 나는 솔개와 연못에서 노는 물고기를 말 없는 벗으로 삼아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 성현 사업(학문을 닦고 덕을 쌓는 일)을 하시었다. 맑은 시내를 비스듬히 건너 낚시터도 완연하구나. 묻노라, 갈매기들아! 옛 일을 네 알리라. 엄자릉(중국 후한 때의 은사)이 어느 해에 한나라 조정으로 간단 말인가? 이끼 낀 물가 모래 위에 연기만 잠겼어라. / 성현 사업을 한 회재 선생을 생각함
춘복(春服)을 새로 입고 영귀대(詠歸臺)에 올라오니 여경(麗景)은 고금(古今)업서 청홍(靑紅)이 절로 하니 풍호영이귀(風乎詠而歸)를 오늘 다시 본 듯하다. 대하 연당(臺下蓮塘)의 세우(細雨) 잠깐 지나가니 벽옥(碧玉) 같은 넓은 닙헤 흐채나니 명주(明珠)로다. 이러한 청경(淸景)를 보암즉도 하다마는 염계(簾溪) 가신 후(後)에 몇몇 해를 지낸 게오. 의구 청향(依舊淸香)이 다만 혼자 남아고야. 자연(紫煙)이 빗긴 아래 폭포(瀑布)를 멀리 보니 단애(斷崖) 노픈 긋해 긴 내희이 걸려난 듯. 향로봉(香爐峰) 긔 어디오 여산(廬山)이 예롯던가. 징심대(澄心臺) 굽어보니 비린(鄙吝)텃 흉금(胸襟)이 새로온 듯 하다마는 적막공대(寂寞空臺)예 외로이 안자시니 풍청경면(風淸鏡面)의 산영(山影)만 잠겨 있고 녹수음중(綠樹陰中)에 온갖 새 슬피 운다. 배회사억(徘徊思憶)하며 진적(眞跡)을 다 찾으니 탁영대(濯纓臺) 연천(淵泉)은 고금(古今)업시 말다마는 말로홍진(末路紅塵)에 사람마다 분경(紛競)커든 이리 조한 청담(淸潭)에 탁영(濯纓)할 줄 긔 뉘 알리.
⇒ 봄옷을 새로 입고 영귀대(시문을 외우며 즐기는 언덕)에 올라오니 그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청홍(靑紅)이 절로 나니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옴(풍류를 즐김)을 오늘 다시 본 듯하다. 높은 언덕 아래 연꽃이 핀 못에 가랑비 잠깐 지나가니 푸른 구슬 같은 넓은 잎에 흩어지는 것이 고운 구슬이로다. 이러한 푸른 경치를 보는 것도 많다마는 염계(송나라 학자 주돈이의 호) 가신 후에 몇몇 해를 지낸 게오. 그 옛날의 맑은 향기가 다만 여기 남았구나. 자줏빛 안개 비낀 아래 폭포를 멀리 보니 낭떠러지 높은 끝에 긴 시내가 걸렸는 듯. 향로봉(여산에 있는 이름난 봉우리) 그 어디요, 여산(중국 강서성에 있는 명산)이 여기던가. 징심대(마음을 맑게 하는 언덕) 굽어보니 더럽고 인색하던 가슴 속이 새로운 듯 하다마는 적막한 빈 대에 외로이 앉았으니 바람이 맑아 거울 같은 수면에 산 그림자만 잠겨 있고 우거진 푸른 나무 그늘에 온갖 새 슬피 운다. 거닐면서 생각하며 옛날의 자취를 다 찾으니 탁영대(갓끈을 씻는 물가 언덕) 물가는 예전처럼 맑다마는 말세의 티끌 세상 사람마다 어지럽게 싸우거든 이리 맑은 못에 때 씻을 줄 그 누가 알리. / 귀대의 경치를 보며 세상을 개탄함
사자암(獅子巖) 노피 올라 도덕산(道德山)을 바라보니 옥온함휘(玉蘊含輝)는 어제론 듯 하다마는 봉거산공(鳳去山空)하니 두견(杜鵑)만 나죄 운다. 도화동(桃花洞) 나린 물이 불사주야(不舍晝夜)하여 낙화(落花)조차 흘러오니 천태(天台)인가 무릉(武陵)인가 이 땅이 어딘 게오. 선종(仙蹤)이 아득하니 아모댄 줄 모라로다. 인자(仁者)도 아닌 몸이 무슨 이(理)들 알리마는 요산망귀(樂山忘歸)하여 기암(奇巖)을 다시 비겨 천원(川原) 원근(遠近)에 경치(景致)를 살펴보니 만자천홍(萬紫千紅)은 비단빛이 되어 있고 중훼군방(衆卉群芳)은 곡풍(谷風)에 날려오고 산사 종성(山寺鐘聲)은 구름 밖에 들리나다. 이러한 형승(形勝)을 범희문(范希文)의 문필(文筆)인들 다 써내기 쉬울런가. 만안 풍경(滿眼風景)이 객흥(客興)을 도오는 듯. 임의소요(任意逍遙)하여 짐즉 더듸 도라오니 거목서잠(擧目西岑)에 석양(夕陽)이 거의로다.
⇒ 사자암 높이 올라 도덕산을 바라보니 구슬이 쌓여 빛을 머금고 있음(회재 선생의 학덕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알아준다는 뜻임)은 어제런듯 하다마는 봉황이 날아가 버려 산은 비었으니(회재 선생은 돌아 가셨지만 그가 살던 곳은 그대로 있음) 두견만 밤에 운다(회재 선생이 없는 빈산에서 느끼는 쓸쓸한 감정을 두견에 이입함). 도화동 내린 물이 밤낮 없이 떨어진 꽃조차 흘러오니 천태(천태산. 중국의 산 이름)인가 무릉(선경)인가 이 땅이 어딘 것인가? 신선들이 놀던 자취가 아득하니 어디인 줄 모르겠네. 인자도 아닌 몸이 무슨 이치를 알랴마는 산이 좋아 기이한 바위를 다시 의지하여 시냇가의 경치를 살펴보니 만 가지 보랏빛, 천 가지 붉은 빛은 비단 빛이 되어 있고 여러 가지 풀과 향기로운 꽃은 골바람에 날려 오고 산사의 종소리는 구름 밖에서 들리누나. 이러한 모습을 범희문(송의 문필가)의 문필이라 한들 다 써내기 쉬웠겠는가. 눈에 가득히 전개되는 풍경이 나그네의 흥을 돋우는 듯. 여기저기 거닐어서 일부러 천천히 돌아오니 눈에 뜨이는 서산 봉우리에 저녁 해가 거의 지네. / 사자암에 올라 도덕산의 경치를 바라봄
독락당(獨樂堂) 고쳐 올라 좌우(左右)를 살펴보니 선생 풍채(先生風彩)를 친(親)히 만나 뵈옵는 듯. 갱장(羹牆)에 엄연(儼然)하여 부앙탄식(俯仰歎息)하며 당시(當時) 하시던 일 다시금 사상(思想)하니 명창정궤(明牕靜几)예 세려(世廬)를 잊으시고 성현서(聖賢書)에 착의(着意)하여 공효(功效)를 일워 내어 계왕개래(繼往開來)하여 오도(吾道)를 밝히시니 오동방낙지군자(吾東方樂只君子)는 다만 인가 여기로다. 하물며 효제(孝悌)를 본(本)을 삼고 충성(忠誠)을 벱허 내어 성조(聖朝)에 나아 들러 직설(稷偰)의 몸이 되어 당우성시(唐虞盛時)를 이룰까 바라다가 시운(時運)이 불행(不幸)하여 충현(忠賢)을 원척(遠斥)하니 듯는 이 보는 이 심산궁곡(深山窮谷)엔들 뉘 아니 비감(悲感)하리. 칠년장사(七年長沙)에 불견천일(不見天日)하고 폐문심성(閉門深省)하사 도덕(道德)만 닦으시니 사불승정(邪不勝正)이라 공론(公論)이 절로 일어 존숭도덕(尊崇道德)을 사람마다 할 줄 알아 강계(江界)는 적소(謫所)로대 유화(遺化)를 못내 잊어 궁항절역(窮巷絶域)에 사우(祠宇)조차 새워시니 사림추앙(士林趨仰)이야 더욱 일러 무삼하리.
⇒ 독락당에 다시 올라 좌우를 살펴보니 선생 풍채를 친히 만나 뵈옵는 듯. 자나 깨나 눈에 선함이 확실하여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보며 탄식하며 당시 하시던 일을 다시금 생각하니 밝은 창과 고요한 책상에서 세상일에 관한 근심을 잊으시고 성현의 책에 뜻을 두어 공부를 이뤄 내어 성현에게 배우고 후인을 가르침에 우리나라의 도를 밝히시니 우리 동방의 덕 있는 선비는 다만 그대인가 여기노라. 하물며 효도와 화목함을 근본으로 삼고 충성을 베풀어 내어 조정에 나아가 후직과 설(순임금의 유명한 신하들)의 몸이 되어 요순의 태평시대를 이룰까 바라다가 시운이 불행하여 충성스럽고 현명함을 멀리 물리치니 듣는 이 보는 이 깊은 산 속 험한 골짜기엔들 누가 아니 슬퍼하리. 칠 년 동안 긴 귀양살이에 하늘 해를 보지 못하고 문 닫고 깊이 반성하여 도덕만 닦으시니 바르지 못한 것이 바른 것을 이기지 못하니 공론이 절로 일어 도덕을 숭상함을 사람마다 할 줄 알아 강계는 (회재 선생의) 귀양지로되 끼쳐 놓은 교화를 못내 잊어 궁벽한 시골에 사당(경현 서원)을 세웠으니 선비들의 추앙이야 더욱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 선비들이 회재 선생을 추앙하여 사당을 세움
자옥천석(紫玉泉石) 위에 서원(書院)을 지어 두고 제제청금(濟濟靑襟)이 현송성(絃誦聲)을 이어시니 염락군현(廉洛群賢)이 이 따에 뫼왔는 듯 구인당(求仁堂) 돌아올라 체인묘(體仁廟)도 엄숙(嚴肅)할사 천추혈식(千秋血食)이 우연(偶然) 아닌 일이로다. 추숭존경(追崇尊敬)을 할수록 못내 하여 문묘(文廟) 종향(從享)이 긔 더욱 성사(盛事)로다. 오동방(吾東方) 문헌(文獻)이 한당송(漢唐宋)에 비기로세 자양(紫陽) 운곡(雲谷)도 어즈버 여기로다. 세심대(洗心臺) 나린 물에 덕택(德澤)이 이어 흘러 용추(龍湫) 깁흔 곳에 신물(神物)조차 잠겼으니 천공조화(天工造化)가 긔 더욱 기이(奇異)코야 무변진경(無邊眞景)을 다 찾기 어려울 새 낙이망반(樂而忘返)하여 순월(旬月)을 엄류(淹留)하며 고루(固陋)한 이 몸에 성경(誠敬)을 넙이 하여 선생 문집(先生文集)을 자세(仔細)히 살펴보니 천언만어(千言萬語) 다 성현(聖賢)의 말삼이라 도맥공정(道脈工程)이 일월(日月)같이 밝았으니 어두운 밤길에 명촉(明燭) 잡고 옌 듯하다. 진실로 이 유훈(遺訓)을 강자리(腔子裏)예 가득 담아 성의 정심(誠意正心)하여 수성(修誠)을 넓게 하면 언충행독(言忠行篤)하여 사람마다 어질로다. 선생(先生) 유화(遺化) 지극(至極)함이 어떠하뇨. 차재(嗟哉) 후생(後生)들아 추앙(推仰)을 더욱 높여 만세천추(萬世千秋)에 산두(山斗) 같이 바래사라 천고후지(天高地厚)도 유시진(有時盡) 하려니와 독락당(獨樂堂) 청풍(淸風)은 가업실가 하노라.
⇒ 자옥산의 자연 경치 위에 서원을 지어 두고 재주 많은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고 글 읽는 소리를 이었으니 많은 어진 선비들이 이 땅에 다 모인 듯 구인당(옥산 서원에 있는 집채의 이름) 돌아올라 체인묘(옥산 서원에 있는 사당 집채의 이름)도 엄숙할사 끊임없는 제사가 우연이 아닌 일이로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러러 높이고 모시는 것을 못내 하여 문묘종향이 그 더욱 성사로다. 우리나라 문헌이 한당송에 비기리라. 자양(중국 안휘성에 있는 산, 주자가 독서하던 곳) 운곡도 아아 여기로다. 세심대 내린 물에 베풀어 준 은혜가 이어 흘러 용추(용이 잠겨 있는 듯한 깊은 연못) 깊은 곳에 신물조차 잠겼으니 조물주의 오묘한 솜씨가 그 더욱 기이하여 끝없는 경치를 다 찾기 어려우니 즐거움에 취해 돌아감도 잊어 열흘이나 한 달 동안 머물며 고루한 이 몸에 정성을 다하여 공경함을 넓게 하여 선생 문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천 마디 만 마디가 다 성현의 말씀이라. 도학의 맥과 공부의 과정이 해와 달같이 밝으시니 어두운 밤길에 밝은 촛불 잡고 간 것 같다. 진실로 이 죽은 사람이 남긴 훈계를 마음속에 가득 담아 바른 마음을 가져 수성을 넓게 하면 말은 충성스럽고 행실은 두터워 사람마다 어질도다. 선생 끼쳐 놓은 교화 지극함이 어떠한가. 아! 후생들아 추앙을 더욱 높여 천년만년 오래도록 태산과 북두칠성같이 바라보세.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움도 마침내 끝이 있으려니와 독락당의 맑은 기운은 끝이 없을 듯싶다. / 독락당에 다시 올라 회재 선생을 추앙함
핵심정리
▶연대 : 조선시대 1619년(광해군11)
▶갈래 : 가사
▶운율 : 3.4조 4.4조 4음보 가사체, 운문체
▶화자의 상황 : 독락당 주위를 산책 中
▶화자의 정서 및 태도 : 완상, 감회
▶특징 : 시간의 흐름 시상 전개
▶주제 : 독락당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이언적의 유덕(遺德)을 추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노계 박인로(1561~1642)가 만년에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살던 경주 옥산의 독락당을 찾아갔을 때인 광해 11년(1619)에 지은 모현가사이다. 내용은 늙은 몸으로 독락당에 찾아가서 회재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곳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중국의 사적들과 견주어 가며 노래하고, 회재선생의 유훈을 길이 받들 것을 권면하고 있다. 분량은 2율각 1구로 헤아려 모두 255구인데, 그 자수을 형식은 3․4조가 주조이고 4․4조가 부주조이며, 결사장은 단형시조의 종장체가 파괴된 형태로 노계집권3에 실려 있다. 3음보 혹은 4음보를 1행으로하여 총 123행으로, 박인로가 지은 가사 가운데 최장편이다. 주제는 작자가 이언적의 유적인 경주 옥산서원의 독락당을 찾아가 이언적을 사모하는 심회와 주변경치를 읊은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10단락으로 구분된다.
첫째 단락에서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무부로서 여가 없이 분주하다가, 늙어서 비로소 들른 지 오랜 독락당을 찾으니 산봉우리는 빼어나 주자가 살던 무이산과 같고, 흐르는 물은 감돌아 정이가 살던 이천과 같다고 하였다.
둘째 단락에서는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 사이에도 성현군자는 많았는데, 이러한 명승지를 하늘이 감추어서 이언적에게 준 것은 물각유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락에서는 독랑당의 유한한 경치와, 한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잠겨 생각하고 깨닫던 이언적의 모습을 안증과 유하를 좌우에 거느린 공자에 비유하였다.
넷째 단락에서는 이뢍의 친필이 담긴 양진암과 관어대 반석 위에 남은 이언적의 지팡이와 신발자국, 손수 심은 큰 소나무를 대하니 마치 지란실에 들어간 듯하다고 읊었다.
다섯째 단란에서는 병풍 같은 층암 절벽, 하늘과 구름이 비친 백척장담, 저녁 안개에 잠긴 청계조기의 묘사를 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던 이언적의 자취를 더듬었다.
여섯째 단락에서는 영귀대의 아름다운 경치에 풍영이귀한 증석의 옛일을 생각하고, 자연 비낀 폭포를 보며 여산에 비기고, 징심대 맑은 물에 가슴속이 새로워짐을 느꼈다. 탁투는 속인들을 생각하고 개탄하고 있다.
일곱째 단락에서는 사자암에 올라 도덕산을 바라보며, 이언적의 덕맘이 구슬이 쌓여 빛을 머금고 있는 듯 하다고 추양하고, 이백의 시를 빌려 이언적을 봉에 비겨 봉새 날아간 빈 산에 두견새만 저녁에 운다고 하여, 그가 가고 없는 쓸쓸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선생의 자취를 천태산과 무릉도원에 비겨 신선으로 받들면서 해질 무렵까지 돌아갈 줄 모르는 간절한 사모의 정을 그렸다.
여덟째 단락에서는 독랑당에 다시 올라 이언적의 풍채와 덕행을 다시금 추앙하고 독서소리가 이어졌던 서원의 번성함을 읊었다. 동방의 군자인 그가 직설과 같은 충성으로 당우의 성시를 이루려 하였는데 시운이 불행하여 을사사회에 강계로 귀양가게 되었음을 슬퍼하고, 적소에서도 끼쳐놓은 감회가 깊어 선비들의 추양을 받고 사당까지 세우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아홉째 단락에서는 구인당에 올라가 체인묘의 엄숙함을 보고 동방의 문물을 한․당․송에 비유하여 주자가 살던 자양운곡이 바로 여기라고 감탄하였다. 세심대 내린 물에는 덕택이 지금도 이어 흐르는 듯하고, 용추 깊은 곳에는 신물조차 잠겨 있는 듯, 그의 무궁한 덕화력은 기이한 하늘의 조화와 함께 어울린 듯하다는 느낌을 말하였다. 달포를 머물면서 그의 문집을 살펴보고, 그것이 모두 성현의 말이어서 일원같이 밝으므로 밤길에 촛불 잡고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언적의 유훈을 가슴깊이 새겨 그를 오래도록 태산북두처럼 추앙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박인로의 가사에는 성현의 치세에 대한 동경이 나타나는 것과, 현실과 이상이 합치되지 못하는 데서 오늘 작자의 고민이 함께 표출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선현을 사모하고 추앙하는 마음을 밀도 있게 표현하였다.
<추가>
이 작품은 박인로가 회재 이언적이 살던 경주 옥산의 독락당을 찾아갔을 때 지은 가사이다. 늙어서야 독락당을 찾게 된 감회를 읊는 것으로 시작하여, 독락당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탄과 이언적을 사모하는 심회를 중국의 고사에 견주어 풀어내는 것으로 이어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언적의 유훈(遺訓)을 가슴 깊이 새겨 오래도록 받들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제시된 부분은 독락당 주변 경치를 찾아다니며 이언적의 모습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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